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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에 대한 리뷰

영화 "황산벌"

by kirang 2014. 9. 7.


2003년 개봉한 이준익 감독의 코미디 영화이다. 정재영과 박중훈이 주연을 맡았다.

“황산벌”은 의외로 역사 공부를 열심히 한 영화다. 영화 도입부에 등장하는 당, 고구려, 백제, 신라의 4자 회담은 7세기 중반의 동북아시아 국제 정세를 제법 정확하게 그려내고 있다. 회담 장소에 앉아 있는 연개소문이 칼을 다섯 자루 차고 있다든지 하는 것을 보아도 제작진이 나름 사전 조사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 전공자의 관점에서 몇 가지 눈에 띄는 점들을 짚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영화에서 김유신은 황산벌 싸움 이전 계백과 싸워서 한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고 되어 있다. 사료에 따르면 김유신과 계백이 맞붙은 것은 황산벌 싸움이 유일하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기록된 김유신은 그야말로 불패의 무장으로, 신라가 백제의 기세에 압도당하고 있는 속에서도 홀로 연전연승을 하는 활약을 펼쳤다. 김유신이 참가하지 않는 전투에서는 백제가 압승하고, 김유신이 참가한 전투에서는 신라가 승리한다는 식이다. 반면 황산벌 전투 이전의 계백의 활약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기록이 누락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다른 백제 장군들의 활동은 여럿 보이는 점을 감안하면 계백이 맡은 직책이 신라와의 전쟁에서 전면에 나설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을 확률이 더 높아 보인다. 

전쟁 발발에 임한 백제 내부의 갈등 묘사. 의자왕이 신하들에게 긴급 상황임을 알리며 병사들을 내놓으라고 하자 신하들이 거부하는 모습이 나온다. 백제가 삼국 중에서 특히 왕권이 약했던 국가임에는 틀림없다. 실제로 역대 백제왕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정리해 보면 눈물이 날 지경이다. 천수를 채추지 못하고 타국 군대에 살해당하거나 정적들에게 암살당하는 게 태반이다. 그러나 의자왕은 즉위 초에 있었던 눈부신 군사 활동의 성공과 과감한 숙청으로 유례없이 왕권을 강화시켰던 군주이다. 그런 그에게, 더구나 국가 위기상황에서 대신들이 명령을 거부하고 반항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다. 아니, 그에 앞서 당시 백제의 군사 동원체제가 신하들이 거느리는 가병들을 지원받아 활용하는 수준이었다고 볼 수도 없다.

영화 자체만으로 보자면 "황산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영화의 성격이 어정쩡하다는 데에 있다. "황산벌"이라는 영화의 목적은 무엇일까. 웃기는 것인가, 아니면 메시지를 던지는 것인가? 물론 양자는 반드시 배치되는 것은 아니며 코메디라는 장르도 진한 페이소스를 남기며 좋은 메시지를 던질 수 있다. 하지만 "황산벌"에선 두 가지가 융합되지 못하고 따로 노는 경향이 있다. 코메디를 할 때는 그저 '웃기자'는 의지 외에 안 보이는데 그나마 억지스러운 점이 많고, 진지할 때는 또 지나치게 어깨에 힘을 주며 정색을 한다.

영화의 전반을 꿰뚫는 키워드인 '거시기'는 실상 별 게 아니며, 이는 시작부터 관객들에게 공개되어 있으므로 그 흔한 맥거핀 역할도 못한다. 김유신이 '거시기'의 실체를 알아냄으로써 황산벌에서 승리한다는 이야기 구조가 전혀 설득력이 없음은 물론이다. 기본적인 아이디어와 설정에서 반짝거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에피소드가 빈약하여 러닝타임을 채우는 게 힘에 부친다는 인상을 준다.이 영화가 차라리 단편이었다면 참신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럼에도 정이 가는 부분이 아예 없지는 않다. 가문과 국가를 위한다는 대의명분에 등 떠밀려 억지로 적진으로 뛰어드는 화랑들의 모습이나, 제 자식들을 죽이려는 남편에게 악다구니를 치는 계백 처의 모습이나, 계백이 죽는 순간에 세상에 남기고자 했던 평범한 민초 거시기의 존재 등에서 인간과 약자에 대한 연민의 시선이 엿보인다는 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