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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에 대한 리뷰

책 "유럽 문명의 아버지 고선지 평전"

by kirang 2012. 1. 13.
 



지배선
 (지은이) | 박진호 | 김현아 (그림) | 청아출판사 | 2002-11-25 


우선 제목에서 멈칫하게 된다고선지가 유럽 문명의 아버지라... 이건 좀 너무 나간 것 아닌가아니나 다를까, 본문으로 들어가면 제목에서 느꼈던 우려가 기우가 아님을 알게 된다.

고선지에 대한 저자의 애정은 대단하다. 한 인간의 삶을 하나하나 더듬는 작업을 하다 보면 그에 대한 애정이 생기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은 애정이 지나쳐 평전으로서 가져야 할 품위를 감쇄시키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역사적 업적을 쌓은 인물의 인품이 반드시 고매할 필요는 없다. 세계 제일의제국을 세운 칭기스 칸은 잔인하고 여색을 밝히며 엉뚱하게도 개를 무서워했다고 한다. 아메리카를 발견한 콜롬부스는 광신(狂信), 비열했으며 욕심 사나운 인물이었다고 한다. 소위 역사를 움직인 위인이란 자들은 오히려악하고 독한인물들이었을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을 낱낱이 밝히는 것은 화려한 커튼 뒤에 숨겨진 위인의 면모를 드러내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따라서 고선지에 대한 각종 기록에 그의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성품이 서술되었다고 해서 이에 대해 정색을 하고 반박하는 것은, 어쩐지 불필요해 보인다. 여기에 탈라스 전투에서의 패배조차도 고선지의 잘못이 아니라는 식의 싸고도는 어조는 저자가 객관적이고 균형잡힌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하기 충분하다.

다른 무엇보다 저자는 유럽 문명의 아버지라는 감당하기 힘든 칭호에 걸맞는 고선지의 업적을 제시하지 못한다. 당연한 것이, 고선지는 애초에 유럽이라고는 구경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가 유럽에 미친 영향이래 봐야 탈라스 전투에서의 패배로 제지 기술 등이 아랍을 통해 유럽으로 전해졌다는 데 있다. 그러나 의도하지도 않았던 몇몇 발명품(물론 고선지가 발명한 것도 아니다)의 간접적 전파를 두고 문명의 아버지를 운운한다는 것 자체가 유럽 문명에 대한 컴플렉스를 역설적으로 표출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굳이 이들 발명품을 유럽 문명과 연결시키고자 한다면 오히려 '중국은 유럽 문명의 아버지'라는 표현이 설득력 있으리라.

전체적인 논조에서 균형감을 잃고 있지만 쉽게 읽히는 문장과 원색 그림들, 자료 소개 등은 비전공자들의 교양서적으로는 나쁘지 않다. 어차피 책을 읽는 행위가 일방향이 아닌만큼 독자가 적절히 걸러서 읽는다면 8세기 중앙아시아와 그곳을 누볐던 고구려 유민 고선지를 느끼기에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