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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노트

보부상-부보상 논란 추가. 어느쪽이 진짜 역사왜곡인가.

by kirang 2009. 6. 15.

  앞선 포스팅에서 이미 조선 정부가 스스로 '보부상'이라라는 합성어를 만들어 사용했음을 당대 발행 책자들의 존재를 통해 증명한 바 있다. 손을 댄 김에 조금 더 찾아보았다. 다음 자료는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대한제국기 행정 공문서이다. 여기에도 보부상이라는 용어가 분명하게 등장한다.

 

  첫번째 문서는 광무 4년(1900년) 12월 29일 의정부 참정이 동래부윤에게 보내는 것이다. 아예 문서제목에서부터 보부상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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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번째 문서는 광무 8년(1904) 12월 23일 문서로, 의정부 참정이 각지 관찰사들에게 보내는 공문서다. 본문 중 두번째 장의 다섯번째 줄에 보부상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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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대 관료들의 글씨와 서명, 도장이 찍혀 있는 이런 자료는 조작이나 왜곡이 불가능한 것들이다.이들 자료에 따르면 보부상이라는 용어가 조선이나 대한제국 정부 공문서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었음이 확실하다. 이것 말고도 일성록, 상소류, 고문서류에서도 '보부상'의 용례는 계속 쏟아져 나온다. 심지어 '부보상 운동'을 벌이는 이들이 열심히 떠받들고 있는 황국협회 관련 인물의 글에서도 보부상이라는 용어가 발견된다. 도대체 이훈섭 교수는 무슨 배짱으로 보부상이라는 용어가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조작된 용어라고 계속 주장하는지 모르겠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보자. '부보상'이 '보부상'이 된다고 해서 달라질 게 무엇이 있을까. 부상은 보상보다 우월한 것인가. 혹은 보상은 부상보다 우월한가. 일개 복합명사의 앞뒤 순서를 바꾸는 게 조선총독부까지 나서서 '왜곡'씩이나 할 정도로 엄청난 일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내가 보기엔 별다른 근거도 없으면서 우리 조상들에 의해 사용되었던 것이 분명한 보부상이라는 용어를 일제가 악의적 의도로 만들어낸  용어라고 매도하는 것이야말로 역사왜곡이라고 할 법하다. 


  누군가 '보부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마다 단체로 몰려가 '부보상'이 맞다고 지적하는, '계도 활동'을 펼치는 부보상 운동은 병적인 측면을 띄고 있다. 무엇보다 정상적인 피드백 작용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게 문제다. 그들은 조선총독부는 '절대악'이고, 절대악이 부보상이라는 용어를 왜곡한 것은 불변의 진리이며, 이에 부합하지 않는 자료는 조작되어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일제와는 아무 상관 없는 조선시대 말에 작성된 자료들조차도 그렇게 매도하는 반면,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에 의해서 부보상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사례가 나오면 '양심적 학자'들이라고 칭송한다(이 양심적인 학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뒤에서 다시 폭로해 주겠다). 논리와 근거를 따져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추종하는 명제에 부합하면 좋은 편, 부합하지 않으면 나쁜 편이라는, 퇴행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첫째, 지적 게으름이다. 규장각이나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에서 검색 몇 번만 하면 부보상 운동 주장에 반하는 자료들이 주르륵 나온다는 것은 그들이 역사 전공자는 아니니까 이해해 줄 있는 문제이다. 하지만 관련 자료들에 대한 전문적 조사 이전에 부보상 운동 자체의 논리와 수사는 그 자체로도 너무 조잡하다. 이 수준 낮은 논리에 휘둘리는 사람들은 분명 반성할 필요가 있다. 부보상을 보부상이라고 앞뒤 순서만 바꾸어 표기하는 것을 두고 '조선시대의 유구한 전통을 무너뜨리는 억상이간책이자, 조선인 구성원의 남녀내분을 일으키고자 하는 간악한 책동'이라고 주장하는 글을 보고 자연스럽게 수긍이 된단 말인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둘째, 피해망상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잘못한 게 무척 많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도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일제가 무슨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 것이라고 의심을 하는 것도 좋다. 어차피 학문의 영역에서 의심은 권장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의심을 부정하는 증거 자료들이 속속 나오면 다른 방향에서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자신이 '처음 품었던 의심'에 대한 의심도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이런 자연스러운 사고 흐름이 안 되는 것은 "일제가 무엇 무엇을 왜곡/잘못했다"는 말이 마법의 주문처럼 이성을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일제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면 앞뒤 따지지 않고 무조건 사실일 것이라고 믿고 보는 행태, 그에 반하는 명백한 증거가 나와도 왜곡이나 조작이라고 부정하고 보는 행태는 학문적 태도가 아니다.

 

  어차피 보부상이나 부보상이나 어느 하나가 틀린 말도 아니고, 두 용어 모두 조선시대~일제시대에 별 구분 없이 쓰였으므로, 부보상이라 부르고 싶은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다고 해서 내가 기분 나쁠 일은 없다. 하지만 지적 게으름과 피해망상으로 뒤섞인 엉터리 주장이 의기양양하게 사람들 사이에 퍼지고,아무 문제도 없는 보부상이라는 용어가 편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은 불편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이훈섭이 얼마나 황당한 주장을 하는 사람인지 마무리를 짓기 위해 그가 '부보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양심적인 일본학자라고 추켜세운 이들의 면면을 들여다 보자.

 

  이훈섭은 1925년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보부상이라는 용어가 처음 왜곡되었지만,


"일본의 민간출판사인 대등각(大 閣)에서 1928년에 발행한<조선경제사(朝鮮經濟史, 猪谷善一 著178쪽>와 계명사(鷄鳴社)에서 1931년에 발행한<조선잡기(朝鮮雜記, 菊池謙讓, 147쪽>에는 양심적인 학자들에 의하여 부보상(負褓商)으로 명백히 등재되어 있다."


고 설명하였다. 즉, 일본 학자들이기는 하지만 '부보상'이라는 올바른 용어를 사용한 훌륭한 사람들이라는 얘기다. 이 양심적인 일본인 학자들이 과연 어떤 사람들인지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다. 먼지 쌓인 도서관을 뒤지는 수고를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내 집 컴퓨터를 켜고 검색엔진에 단어 몇 개 친 것만으로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는 점을 강조해 둔다.

 

  우선 <조선경제사>의 저자인 이타니 젠이치(猪谷善一)에 대해서 <내일을 여는 역사>(서해문집,2003)의 본문 중에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이타니 젠이치(猪谷善一)는'조선의 청년들이 무의미한 독립운동이나 사회주의 선전에 광분하지 말고 냉정히 협동조합 운동에 종사하여 피폐한 국토를 진단하고 생산력의 증가를 희구해야 한다'며고조된 민족 해방 운동의 분위기를 잠재우려 하였다."


  독립운동을 '무의미한 광분' 정도로 생각하고, '민족해방 운동을 잠재우려 했다'는 점에서 특별히 '양심적'인 학자라는 느낌은 없다. 당시 일본인으로서는 극히 평범한 식민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학자였던 것 같다. 진짜 문제는 그 다음이다.

 

   <조선잡기>라는 책의 저자인 기쿠치 겐조(菊池謙讓)라는 사람은 한말에 한국에 특파원으로 온 적이 있었던 일본 언론인 출신 학자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한국에 특파원으로 왔을 때 무슨 일을 했냐면, 무려 '을미사변' 가담이다. 칼 들고 궁궐에 침범해 명성왕후를 시해한 무리의 일원이라는 이야기다. 게다가 각종 저서를 통해 앞장 서서 한말의 상황을 왜곡하고 조선의 식민지화를 정당화 했던 악질중에 악질이다. 

 

  이런 사람이 보부상이 아닌 부보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졸지에 '양심적 학자'가 되어 버렸다. 조선총독부의 왜곡이 어쩌니, 민족정신이 어쩌니 하면서 애국자 역할은 자기들이 독점한 것처럼 굴던 이훈섭 이하 '보부상 운동가'들은 정작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프로파간다를 양산했던 자를 '양심적 학자'로 추켜세우는 망동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훈섭 교수가 자기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학점을 미끼로 부보상 운동을 시키고 있는 것으로 안다. 계도라는 명목하에 여기 저기 몰려다니며 도배질을 하고 있는데,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다. 한마디로 길거리에서 '도나 기에 관심 있냐'고 물으며 돌아다니는 행위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 


  해당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충고하고 싶다. 세상엔 배우고 익혀야 할 좋은 지식과 교양이 많다. 들어서 피와 살이 되는 좋은 수업도 많다. 그대들의 등록금과 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