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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에 대한 리뷰

영화 "러브레터"

by kirang 2009. 5. 21.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가 제작된 것은 1995년이다.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수입된 것은 몇 년 후였지만. 수입 시점에선 이미 적지 않은 이들이 어둠의 경로로 감상한 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한국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일본 영화=선정적이고 저질' 이라는 엉뚱한 선입견을 벗겨내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그러고 보면 일본 문화는 저질이고 퇴폐적이기 때문에 수입을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편견 가득한 주장이 진지하게 논의되던 시절이 불과 10여 년 전 일이다.

     어쨌든 이 영화가 세상에 나온지도 햇수로 15년이 되었다. 적지 않은 세월이지만, 지금 보아도 촌스럽거나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아마 앞으로 15년이 흐른 뒤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의 화면을 채우고 있는 설경의 아름다움은 유행을 타지 않는 자연의 아름다움이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뜻 고백하지 못하고 한없이 머뭇거리는 짝사랑의 풋풋한 감성은 모든 시대의 청소년들이 거치는 통시대적 경험이기 때문이다.  

   등산을 갔다가 조난을 당해 사망한 후지이 이츠키의 연인 히로코는 그가 죽은지 2년이 지나고, 새 남자를 만나게 되었음에도 옛 감정을 쉽사리 정리하지 못한다. 그런데 전언에 의하면 후지이 이츠키는 죽는 순간에 '내 사랑은 이곳이 아닌 남쪽에 있음'을 암시하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후지이 이츠키가 죽는 순간 떠올렸던 사람은 현재 연인인 히로코가 아니라,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중학교 동창 후지이 이츠키였다. 후지이 이츠키가 히로코와 연인관계가 되었던 것은 히로코가 또 다른 후지이 이츠키와 닮은 용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소 여자 문제에 대해선 쑥맥이었던 그는 히로코를 보자마자 '고백해야 한다'고 불쑥 일어났다고 한다. 히로코에게는 슬픈 일이지만, 그는 어린 시절 좋아했지만 미처 고백을 하지 못하고 헤어져야 했던 또 다른 후지이 이츠키를 내내 생각해 왔던 모양이다.

    정작 또다른 후지이 이츠키는 자신이 다른 후지이 이츠키에게 죽음의 순간까지 간절하게 그리는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였다. 후지이 이츠키가 산에서 숨을 거두고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일련의 사건을 통해 학창 시절을 되짚어 보게 되고, 자기도 그 시절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이미 지나간 일이 되었다. 후지이 이츠키는 이미 2년 전에 죽었고, 학창 시절은 그보다 훨씬 더 전에 지나가 버렸으므로. 남는 건 조용히 볼을 타고 흐르는 아쉬움의 눈물뿐이다.

  이 영화에서는 여느 로맨스물이 그렇듯 연인들이 티격태격하며 연애의 진도를 나가는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남자 주인공인 후지이 이츠키는 아예 영화의 시작부터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성장한 남자 후지이 이츠키는 한 번도 화면에 모습을 비추지 않는다. 관객들은 살아 있는 주변인들의 기억을 통해 후지이 이츠키라는 남자를 간접적으로 상상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어긋나고 실패한 사랑에 대한 애틋한 회고담이다.

  "러브레터"는 슬프고 애틋한 로맨스를 다루는 영화가 가질 수 있는 장점을 모두 갖춘 영화다.  눈으로 뒤덮인 아름다운 배경과 아름다운 배우들, 아름다운 음악이 잘 조화가 되어 있다. 특히 단조의 음악처럼 마지막 순간 관객의 마음을 흔들어 여운을 남기는 엔딩은 이 영화의 백미라 하겠다. 

 
* 덧붙임 : 이 영화가 언급될마다 튀어나오는 '오겡키데스카~'.  왜 그 장면을 그렇게들 인상적으로 보았는지 모르겠다. 이 영화에는 그보다 좋은 장면들이 훨씬 많은데. 내가 놓친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