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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에 대한 리뷰

드라마 "환생-NEXT"

by kirang 2009. 5. 17.



  "환생-NEXT"(이하 '환생'이라고 지칭)는 2005년 MBC에서 다른 드라마의 펑크를 메우기 위해 급조한 옴니버스 형식의 판타지 드라마이다. 2쌍의 남녀가 각 시대마다 환생을 되풀이하며 슬프고도 엇갈리는 사랑을 한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현생, 일제시대, 조선시대, 고려시대, 상고시대가 교차적으로 배경이 되며, 주인공 역은 류수영, 박예진, 이종수, 장신영이 맡았다. 



   자운영과 카사르 (박예진과 류수영)


  나는 일반적인 로맨스물을 썩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진용이나 시월애 같이 시간을 넘나드는 류의 이야기는 좋아한다.  2005년 방영 당시에도 이 드라마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방영하는 것을 흘깃흘깃 보았을 뿐 본방을 제대로 사수하지는 못했다. 때문에 기억이 매우 단편적으로 남아 있다. 나뿐만 아니라 실제 이 드라마는 많은 시청자들에게 외면받으며 낮은 시청률을 기록한 실패한 드라마로 남았다.


  그런데 시청률뿐 아니라 작품 완성도에 대해서도 혹평을 받았던 이 드라마에서 고려편(5~6회)만큼은 신기할 정도로 시청자들의 호평을 받았다. 시나리오 작가와 연출자가 따로 배정되어 있고(환생 고려편의 시나리오는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시나리오를 쓴 고은님이 맡았다) 각 이야기의 독립성이 보장되는 옴니버스 형식의 드라마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고려편에 대한 세간의 칭찬이 꽤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기회가 되면 제대로 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어쩌다 보니 지금껏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다 최근 "패밀리가 떴다"로 인기 상종가를 치고 있는 박예진의 활약을 보며 그가 출연한 "환생"을 기억에 떠올리게 되었고, 종영된지 4년만에 드라마를 찾아 보게 되었다. 


  환생 고려편의 내용은 특별할 것이 없다. 고려는 강력한 몽골군의 침략으로 연전연패하며 수도 개경마저 함락당하게 된다. 몽골군을 이끄는 것은 맹장 카사르(류수영 분). 확연한 전력의 차이를 극복할 수 없어 고민하던 고려군은 아름다운 기녀를 적진에 보내 틈을 보아 적장 카사르의 목을 벤다는 계책을 세우게 된다. 이때 기녀 자운영(박예진 분)이 동생을 천민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자, 목숨을 건 임무를 자청한다. 고려의 장군 김웅서(이종수 분)는 평소 자운영에게 애틋한 마음을 품고 있었기에 이를 반대하지만 자운영의 의지가 확고하고 딱히 다른 방법도 없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계략을 진행시킨다. 이후의 스토리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강하고 꼿꼿한 성품의 자운영은 카사르의 마음을 흔들게 되고, 한결같이 자신을 배려해 주는 카사르에게 차갑기만 하던 자운영도 어느 사이엔게 마음을 열게 된다. 




  원수인 적국의 장수와 그 목을 베는 임무를 숨기고 접근한 사람이 서로에게 연정을 품게 되었으니 파국은 당연지사. 두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비극뿐이다..


  이야기의 전체적 흐름은 뻔하다 싶을 정도로 예측 가능하며, 주인공들의 행동은 때로 자연스럽지 못하고 개연성이 떨어지곤 한다. 특수효과라든지 분장 등에서 급히 만든 땜질용 드라마답게 헛점도 많이 발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는 상당히 볼만하다. 두 사람의 감정이 쌓이고 서로를 용납하게 되는 과정이 차곡차곡 설득력 있게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박예진 개인의 매력도 큰 역할을 한다. 박예진이 연기한 자운영은 극의 중반부터 카사르가 준 붉은 색 몽골 복장(실제 몽골 옷을 고증해 만든 것은 아닐거라 생각되지만)을 입고 다니는데 이것이 또 굉장히 잘 어울린다. 이 드라마에서 붉은 옷을 입은 박예진이 보여 주는 우아함과 고전미는 무척 인상적이며, 이 여인의 기구한 운명에 대한 동정심을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처음  봤을 때 다소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 분장을 한 류수영 역시 배역에 잘 녹아든 연기를 펼치며 분장의 핸디캡을 극복한다. 특히 파국의 끝, 절정부에서 류수영과 박예진이 어우러져 보여 주는 연기는 강한 몰입감을 주는 좋은 장면이다. 뻔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에서 이들이 주고 받는 대사와 눈빛은 굉장히 인상적이며 가슴에 큰 울림을 준다. 제한된 여건에서 적절한 연출, 음악, 배우들의 열연이 빚어낸 좋은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류수영의 좋은 연기와 별개로 카사르의 마지막 대사는 너무 통속적인 감이 있어 불만스럽기도 하지만, 이에 대한 자운영의 마지막 대사와 절절한 연기는 이 드라마뿐 아니라 한국의 역대 사극들을 통틀어도 손꼽히는 명장면이라 여겨진다.



   류수영과 박예진이 연기혼을 불사르고 있을 때 다른 두 주인공인 이종수와 장신영은 거의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이는 고려편이 류수영과 박예진을 중심으로 하는 스토리이기 때문인데, 그렇다 해도 어느 정도 갈등과 위기 분위기를 조성해야 할 김웅서(이종수)와 아해(장신영)가 앞의 두 사람의 관계에 아무런 위협도 주지 못하는 점은 문제이다. 고려편에서의 장신영은 아예 없어도 상관없을만큼 존재감 없는 배역을 연기했고, 이종수가 연기한 김웅서는 이야기의 진행을 위해 기능적인 역할만을 수행했을 뿐이다.  


  본래 이 드라마는 4명의 남녀 주인공이 시대에 따라 상대와 역할이 바뀌며 얽히는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에 배우 간 밸런스가 중요했다. 특히 장신영의 경우는 실질적인 여주인공이라, 주조연급인 박예진이 다소 손해를 보며 서포트해주는 구도가 되어야 했는데, 박예진이 고려편에서 워낙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바람에 배우 간 밸런스는 물론이고 극 전체의 밸런스와 의도마저 흔들리게 되었다. 남주인공인 류수영과 맺어져야 할 여주인공이 오히려 남주인공과 여자 주조연급의 사랑을 방해하는 천덕꾸러기처럼 되어 버렸다.


  고려편을 제외한 나머지 편들의 내용은 썩 훌륭하다고 하기 힘들다. 조선편과 일제시대 편은 어느 정도 가능성을 보여 주기는 했지만 고려편과 같은 임팩트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실패했다. 게다가 고려편에서의 류수영-박예진 커플의 활약으로 여주인공으로서의 장신영의 입지가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작진은 여전히 류수영과 장신영을 중심으로 극을 진행 하는 기존의 설정을 고수하였다. 안 그래도 시간에 쫒기는 상태에서 설정의 방향을 틀 여유는 없었겠지만, 박예진과 장신영의 전복된 입지가 반영되지 못하자 드라마의 설득력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시원편에서는 보는 이가 아연실색할 정도로 내용이 엉망진창이 되었고, 현생편의 후반부에서는 제작진도 이 드라마를 어떻게 진행시켜야 할 지 몰라 허둥대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노출하고 말았다. 방송분량을 채우느라 급급해 하는 와중에 캐릭터들은 일관성을 잃고 우왕좌왕하다가 부서졌고 스토리 또한 마구잡이로 엉키며 마침내 드라마는 자폭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앞에서 말했듯 환생은 졸속으로 기획된 드라마이다. 보다 보면 급박한 시간에 쫒기는 제작진이 현장에서 '빨리 빨리'를 외치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는 류수영과 박예진이라는 배우들의 열연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은 감동을 만들어 냈다. 류수영과 박예진이라는 배우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라면 두 배우가 열악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연기를 펼친 고려편(5~ 6회) 정도는 단막극 시청하는 셈치고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덧붙임 : 이 드라마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이종수이다. 그는 화를 낼 자격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매력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캐릭터만을 연기해야 했고, 류수영과 달리 극중 한번도 여자 주인공들의 사랑을 받아 보지 못했다. 그의 연기력을 탓할 수도 있겠지만, 과연 누가 이런 역에 의욕을 보일 수 있을지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