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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에 대한 리뷰

영화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메멘토 모리"

by kirang 2009. 5. 18.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이후 여고괴담 2로 지칭)는 1998년 개봉하여 큰 방향을 일으킨 여고괴담의 속편으로, 바로 다음해인 1999년 겨울에 개봉하였다. 신인감독 김태용과 민규동이 공동 연출을 맡았고, 역시 신인 배우였던 박예진, 이영진, 김민선이 주연을 맡았다. 주연은 아니지만 상당히 비중있는 조연으로 공효진도 출연했다.

  영화는 크게 두 가지 이야기를 병렬적으로 진행한다. 첫째는 어느 날 아침 학교 수돗가에서 붉은 표지의 교환 일기를 발견한 민아의 모험담이다. 둘째는 민아가 발견한 교환 일기 속에 담겨진 일기장의 공동주인 효신과 시은의 이야기이다. 일기장은 이들이 1학년일 때부터 만들어져 1년치의 기록이 쌓여 있고, 현재 이들은 2학년. 그중 시은은 민아와 같은 반이고, 효신은 다른 반이다. 비록 친분은 없지만 같은 반 친구의 교환일기장을 발견한 민아는 호기심에 그 내용을 읽게 되고, 그 과정에서 첫번째 이야기와 두번째 이야기는 계속 교차되며 진행된다.
  두 이야기가 교차되며 진행되기 때문에 산만하고 복잡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복잡한 이야기는 아니다. 첫째 이야기는 민아가 겪은 하룻동안의 이야기이고, 둘째 이야기는 효신과 시은이 겪은 1년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1년의 이야기의 마지막은 민아가 겪는 하루와 겹쳐지며 두 이야기는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결국 민아는 관객들에게 효신과 시은의 이야기를 전해 주는 전달자이자, 종국에는 그 자신이 이들의 이야기에 등장하고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주요 인물이 된다. 

                모든 문제의 중심, 남다른 정신세계를 가진 첫번째 주인공 효신(박예진 분)

  세 주인공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역시 효신이다. 그는  독특한 사유 방식과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여고생이다. 국어 선생님과 대등한 관계로 사귈 정도로 또래 아이들보다 조숙하면서도 알 수 없는 구석이 있는 캐릭터다. 비사교적인 성격인 데다 같은 반 아이들을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감정을 숨기려 들지도 않기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기도 한다. 그런  효신이 특별하게 마음을 열고 애정을 표하는 사람이 육상부 선수인 시은이다. 시은은 효신에 비하면 지극히 정상적(?)인 활달한 성격의 여고생이다. 그 역시 효신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주위의 시선이나 사회적 규범을 효신처럼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굵은 신경을 가지고 있지는 못한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예민한 한 사람이 과장되게 애정을 퍼붓고 관계를 주도하는 가운데 단순하고 직선적인 성격의 사람이 이를 즐겁게 받아준다는 점에서 이들의 관계는 빨간머리 앤과 그의 친구 다이애나를 연상케 하는 면도 있다. 하지만 효신은 앤보다 훨씬 집착적이고 과격한 데다 이들의 관계는 새끼 손가락을 걸며 영원한 우정을 맹세하는 수준을 넘어서기 때문에 훨씬 위태로워 보인다.

                 결정적 열쇠를 쥐고 있는 두번째 주인공 시은(이영진 분)

   

                그리고 호기심 많은 이야기 전달자, 세번째 주인공 민아(김민선 분). 


  민아가 일기를 중간 정도 읽은 영화 중반의 시점에서 효신은 자살을 한다. 직접적인 이유는 영화 후반에 밝혀지지만, 비단 그 일이 아니라도 효신은 오랫동안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는 언제나 혼자였고, 유일한 소통의 통로였던 시은과의 관계도 예전같이 않았다. 그의 자살은 격정적 감정에 기인한 돌발적인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차곡차곡 쌓인 허무감과 지루함의 결과물이다. 17살의 나이에 삶이 회색빛이라는 걸 눈치챈 그는, 결국 굳이 더 이상 살 이유를 찾지 못한 채 의미 없는 삶을 스스로 버리기로 하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공간인 학교 지붕에서 세상을 응시하다가 추락을 선택한다. 

  효신의 죽음 이후 학교에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 특히 교환일기를 읽으며 효신과 시은 두 사람의 관계에 끼어들게 된 민아는 죽은 효신의 존재감을 강하게 느낀다. 민아는 예사롭지 않은 일을 차례차례 겪으며 두려움에 젖는다. 그날 밤 비가 내리는 와중에 효신의 유령이 나타나 학교를 지배하고, 공포에 질린 학생들로 학교는 수습불가능한 대혼란에 빠지게 된다.
  여고괴담 2는 전작과의 간극이 매우 큰 영화이다. 제작사가 동일하다는 점, 여학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 여고괴담이라는 타이틀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 외에 큰 공통분모가 없다. 완성도나 세련됨과는 별개로 전작이 공포영화로서의 자의식을 단단하게 쥐고 있는 영화인 데 비해 여고괴담 2는 공포영화로서의 자의식이 어중간한 지점에 머물러 있다. 여고괴담 2를 공동연출한 김태용, 민규동 감독은 관객들을 놀라거나 두렵게 만드는 작업에 큰 흥미를 가지지 못한 것이 틀림없다. 실제 이 영화에서 밋밋하거나 겉도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들은 오히려 '공포 영화스러운', '공포 영화처럼 보이고 싶어한' 장면들이다. 관객과의 타이밍 싸움, 긴장감 조성이라는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하면 공포물로서의 이 영화는 그다지 좋은 점수를 받기 힘들다. 개봉 당시 많은 관객들이 불만을 품었던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앞에서의 약점을 상쇄시킬 수 있는 크나큰 장점 또한 가지고 있다. 감각적이고 섬세한 연출, 서정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음악,  현장에서의 성실한 자료 수집과 공부를 통해 디테일하게 구현해 낸 여고생의 일상과 감수성이 그것이다. 공포영화라는 장르에 대한 편견과 기대감을 지워내면 이 영화는 충분히 아름답고 슬프며 매력적인 이야기로 다가온다. 때문에 어떤 이들은 여고괴담 2가 공포영화가 아니라는주장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를 만든이들 스스로가 공포영화를 표방하고 있고, 반드시 성공적이지는 않았더라도 공포영화적 요소를 활용해 영화를 만든 것이 사실인만큼 그렇게까지 단호하게 영화의 정체성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여겨진다. 그냥 이 영화 특유의 독특한 느낌을 만들어 내는 데 일조한 중요한 소스 중 하나였다고 인정하는 수준에서 정리하면 적절할 것 같다.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는 매우 개성있는. 독특한 한국 공포영화다.

 
* 나머지 이야기들

연기
  배우들의 연기는 매끄러움과 어색함이 공존하는데 영화 감상에 거슬리는 부분은 별로 없다. 다소 딱딱한 연기는 그것대로 신선한 느낌과 리얼리티를 준다. 좋은 느낌을 주었던 장면이나 대사의 상당수가 의외로 그런 딱딱한 연기들에서 나왔다. 연기 이야기가 나왔으니 조연으로 출연한 공효진에 대한 언급을 빼놓을 수 없겠다. 공효진은 신인이면서도 감탄스러울만큼 자연스럽고 빼어난 연기력을 보여 주었다. 확실히 연기력이라는 건 타고나는 건가 싶었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효신과 시은의 지붕 장면
  

좋은 장면

  영화에서 가장 좋은 장면으로 많은 사람들이 영화 중반과 엔딩 부분에 나오는 효신과 시은의 지붕 장면을 꼽는다. 나라고 이견을 내놓을 이유는 없다.

  다른 장면으로는 인트로 부분을 꼽고 싶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촛불이 켜지고, 교환 일기를 만드는 장면과 함께 효신의 나레이션이 깔리고,두 여학생이 붉은 끈으로 다리를 묶은 채 물 속에 빠지고, 한 사람이 묶은  끈을 풀어 혼자 물 위로 떠오르고, 수영을 끝낸 시은의 모습이 나오고, 운동장을 뛰던 시은의 귓속으로 카메라의 시점이 빨려 들어가며 영화의 제목이 뜨는 인트로 부분은 여러 번 되풀이해 봐도 좋다. 영화의 내용을 효과적으로 함축한 감각적인 연출이라고 여겨진다. 

  또 하나의 장면을 꼽으라면 영화 막바지 거대한 효신의 유령이 나타나 하늘에서 혼란에 빠진 학교와 학생들을 지켜 보는 장면이다. 꽤 튀는 연출이고, 감독들도 CG를 잘못 썼다고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나는 이 장면도 좋았다. 초현실적인 느낌도 들고(어차피 귀신은 초현실적 존재가 아닌가) 일반적인 유령과 구분되는 그 당당함과 도도함이 효신의 유령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모습의 유령은 앞으로 어떤 영화에서든 보기 힘들 것이다. 

  효신과 국어선생 고형석과의 데이트 및 교실에서의 울음 장면도 괜찮았다. 교사와 학생, 어른과 미성년자라는 관계 때문에 불쾌함을 줄 여지가 있지만, 양자의 사회적 위치가 전복되고 관계의 주도권이 뒤바뀐 모습을 보여 주며 효신이라는 남다른 캐릭터를 설명하는 데 효과적인 역할을 했다고 본다.


아쉬운 부분 

  자살한 효신의 눈. 공포영화에 대한 강박이 캐릭터의 일관성을 해친 경우다. 이 장면은 다시 찍어야 한다고 본다.

  민아가 효신에게 홀려서(?) 시은에게 계속 접근하고 그때문에 절친 그룹의 멤버인 연안과 갈등을 빚는 장면. 편집이 아쉽다. 민아가 연안과 말다툼을 하는 장면 자체는 괜찮지만, 그런 상황이 도출되는 과정이 편집에서 너무 많이 생략되어 갑작스럽다는 느낌을 준다. 

  공효진이 연기한 지원이 국어선생 고형석에게 '왜 당하고만 있느냐'고 설득하다가 결국 '위선자'를 외치고 뺨을 맞는 부분. 여기에서도 고형석이 '어떻게 무엇을 당하고' 있는지에 대한 상황이 생략되어 있어 얼른 이해가 안 간다. 원래는 효신이 고형석의 아이를 가져서 자살했다는 소문이 학교에 돌며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는 등의 일이 있었는데, 극장판 편집에서는 모두 삭제되었다. 

  시은의 고개 외면 사건 이후 한달 동안 효신이 어떠한 고통과 외로움을 견디며 지냈는지에 대한 설명이 생략된 점. 아무와도 소통하지 못하며 점점 가라앉는 효신의 모습을 짧은 에피소드를 통해서라도 보여 주었다면 어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