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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노트

보부상-부보상 논란, '부지런함'과 몰지성이 만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by kirang 2009. 6. 15.

  몇 년 전부터 인터넷상에서 보부상(褓負商)은 일제에 의해 왜곡된 용어이고, 부보상(負褓商)이 옳은 용어라는 주장이 떠돌고 있다. 역사 관련 사이트의 게시판들은 물론 포털의 백과사전에서 네이버 지식인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주장을 펼치는 글들이 앵무새처럼 도배되곤 하는데, 이게 주로 경기대학교에서 이훈섭 교수의 수업을 들은 학생들의 조직적인 행동인 모양이다. 그런데 그 논리가 참으로 해괴하다. 다음은 인터넷에 떠도는 예의 그 부보상 관련 글이다.  


부보상(負褓商)의 용어가 보부상(褓負商)으로 왜곡 둔갑된 연유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사농공상의 일본식 서열개념으로 조선왕조의 중상정책을 폄하(貶下)하기 위한 역사왜곡과 식민정책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일제에 최후까지 반항한 부보상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술책에 기인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1910년 일한병탄(日韓倂呑) 이후 일제의 식민통치가 극성을 부리던 시기인 1925년 조선총독부 총독관방(總督官房) 문서과(文書課)에서 발행한 <朝鮮人의 商業, 善生永助 著>이라는 저서의 제2장 제3절 제2항인 78쪽에서 처음으로 보부상(褓負商)이라는 용어가 대두(擡頭)되었기 때문이다.

문장의 내용에서는 이성계 태조가 부보상(負褓商)이라는 명칭을 부여(附與)했다면서 항목의 제목에는 보부상(褓負商)으로 기록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민간출판사인 대등각(大 閣)에서 1928년에 발행한 <조선경제사(朝鮮經濟史, 猪谷善一 著, 178쪽>와 계명사(鷄鳴社)에서 1931년에 발행한 <조선잡기(朝鮮雜記, 菊池謙讓 著, 147쪽>에는 양심적인 학자들에 의하여 부보상(負褓商)으로 명백히 등재되어 있다.

일제는 이태조의 부보상 육성에 의한 중상주의정책을 왜곡 폄하시키고 일본의 고정관념인 서열적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의식에 입각하여 이태조와 부보상의 밀착관계를 저속화시켜서 조선왕조의 권위(權威)를 날조 실추시키려는 흉계를 견지하고 있었다. 일제가 말하는 사농공상(士農工商)에서의 사(士)는 선비(文士)가 아니고 무사(武士)를 의미한다.

부보상은 부상(負商:男)과 보상(褓商:女)의 합성어(合成語)이다. 본래 사람의 초기생활 수준에서는 식생활(食生活)에 관련된 용품을 판매하는 부상(負商)의 활동이 먼저 발생되었고 그 다음 단계로 점차 생활수준이 향상되면 의생활(衣生活)에 관련된 문화용품을 판매하는 보상(褓商)의 활동이 순차적으로 요구되게 마련이다.

부상(負商)은 물건을 지게(支械)에 지고 팔러 다니던 남자행상(男子行商 : 등짐장수)이고 보상(褓商)은 물건을 보자기(褓: 布)에 싸서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지고 팔러 다니던 여자행상(女子行商 : 봇짐장수)을 말한다.

조선총독부는 부보상의 용어를 남존여비(男尊女卑)의 관념으로 왜곡시켜서 은연중 가족이간(家族離間) 여성해방(女性解放)으로 연결지어서 우리 민족자체의 내부분란을 부채질한 것이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어용학자를 동원하여 부보상(負褓商)을 보부상(褓負商)의 명칭으로 둔갑시켜서 멀쩡한 생선에 가시를 박고 독(毒)을 묻힌 것이다

하여 일제때 식민 정책의 하나로 개명된 말이 보부상이다.

  정리하자면

1. 부보상이라는 전통적인 용어가 처음 보부상으로 왜곡된 것은 1925년 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인의 상업”(善生永助 著)이라는 책이라는 것이다.

2. 이는 이성계의 중상주의정책을 왜곡 폄하시키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의식에 입각하여 이태조와 부보상의 밀착관계를 저속화시켜서 조선왕조의 권위(權威)를 날조 실추시키려는 흉계이고,

3. 남존여비(男尊女卑)의 관념으로 왜곡시켜서 은연중 가족이간(家族離間) 여성해방(女性解放)으로 연결지어서 우리 민족자체의 내부분란을 부채질한 것이라는 것이다. 

  한눈에 봐도 오버스럽다 싶은 괴이한 논리전개이다. 보상과 부상의 합성어에 불과한 부보상을 순서를 바꾸어 보부상이라 표현한 것이 과연 ‘조선왕조의 권위 실추’와 ‘민족의 내부 분란을 부채질’하는 무시무시한 것이 될 수 있을까. 

  부보상이든 보부상이든 내가 보기엔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데, 그게 그렇게 중요하다고 하니 사실관계나 한번 확인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여 조선 왕조실록과 고종순종실록,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자료검색, 규장각의 자료 검색 등을 활용해 부보상과 보부상의 용례를 찾아보았다. 자료는 금방 모을 수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보부상’이라는 용어가 1925년 일제에 의해 처음 왜곡되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보부상, 부보상이 모두 검색되지 않고 보상과 부상이 독립적으로 나오곤 했는데, 고종순종실록을 보면 고종 32년인 1895년에 이미 ‘보부상’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내무아문에서 각 도에 제반규례를 훈시하는 내용인데, 그 28조, 29조, 30조, 45조에 명백하게 '褓負商'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고종 35년인 1898(광무 2)에도 신하가 고종에게 얼마 전 있었던 보부상의 난동을설명하는 부분에서 ‘보부상’이 등장한다.

  이것만으로도 보부상이 일제시대에 왜곡된 용어라는 주장이 말끔하게 논파되는 셈이지만, 기왕 손을 댔으니 더 찾아 보기로 했다. 인터넷에서 찾아본 경제학 사전(박영사)을 보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이와 같이 보부상의 단체는 조선시대 이전에도 존재하였고......1866년 불란서 함대가 침입하였을 때에는 통신으로 공을 세웠다. 그 후 보부청 설치하여 이재면(李載冕)이 청무(廳務)를 총괄하였으며 전국적인 체계를 확립하였다. 1885년에 보부청은 혜상공국(惠商工局)으로 되었고, 대원군은 혜상공국을 상공국(商工局)으로 고쳤다가 다시 상리국(上理局)으로 개명하였다.”

  어라? 1866년 당시 조선 정부가 보부청이라는 명칭의 공식기관까지 만들었다는 얘기다. 만약 그렇다면 ‘보부상=일제의 왜곡’이라는 주장은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확증된다. 그런데 문제가 된 이훈섭 교수의 “부보상을 아십니까” 라는 책을 보니 이런 내용이 있었다.

“본래 황국협회는 부보상을 관리하던 부상청에서 유래되었다. 부상청(負尙廳 1392)이 부보청(負褓廳 1866) 부상청(改設 1881) 혜상공국(혜상공국 1883)으로 개편 발전되었다. 그러므로 보부청은 와전된 명칭이다.부상청은 1883(고종 20)년 중앙에 혜상공국이 설치되어 부상단과 보상단을 합동하고......”

  오호라! 이훈섭 교수도 1866년에 관련 관청이 설치된 것은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경제학 사전에서와 달리 '보부청'이 아니라 '부보청'이라고 슬쩍 바꿔서 서술해 놓았다. 게다가 굉장히 두루뭉실하다. 책에서 “그러므로 보부청은 와전된 명칭”이라고 결론을 내렸지만, ‘그러므로’의 앞에 마땅히 위치해야 할 논리 전개나 근거자료 제시가 전혀 없다. ‘보부상=일제의 왜곡 용어’라는 그의 주장에 따르면 아직 쇄국정책을 펼치고 있던 1866년에 설치된 것은 당연히 부보청이어야 한다. 과연 1866년 설치되었던 것은 부보청일까, 보부청일까. 규장각에서 검색해 보았다. 그 결과 참고할만한 6권의 책이 나왔다.


① “判下八道任房都所節目”褓負廳(朝鮮) 編 필사본
    1881年(高宗 18) 閏 7월에 전국의 褓負商에 관한 제반규정을 모은 책

② “袱商廳節目”褓負廳(朝鮮) 編 필사본
    1881年(高宗 18) 閏 7月에 全國의 褓負商에 관한 제반규정을 모은 책

③  “判下八道任房都所事務”褓負廳(朝鮮) 編 필사본
    1881年(高宗 18) 八道任房都所의 설치를 임금에게 允許받고 이어 負商廳節目과 함께
     負商團이 任房體制로 정비되던 때의 사실을 褓負廳에서 기록한 책

④  “判下八道任房都所事蹟”褓負廳(朝鮮) 編 필사본
    1881年(高宗 18) 八道任房都所의 설치를 임금에게 允許받고 그 사적을 褓負廳에서
     모은 책

⑤  “判下京畿道都所事蹟”褓負廳(朝鮮) 編 필사본
    1881年(高宗 18) 褓負商의 관계사적을 褓負廳에서 모은 것

⑥  “黃海監營關牒謄錄” 議政府(朝鮮) 編
    1866년(高宗 3) 6월부터1869년11월까지 黃海監營에서 올린 關牒을 議政府에서
     謄錄한 것


  앞의 다섯 권을 편찬한 곳이 다름 아닌 보부청이다. 1881년 당시 필사본으로 발행된 것이고, 규장각에서 이들 서지정보를 작성할 때 부보청으로 표기된 것을 일부러 보부청으로 표기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즉, 1866년 국가에 의해 설치된 관청은 부보청이 아닌 보부청이었고, 이 관청은 19세기 후반경 이러저러한 책들을 편찬하는 등의 활동을 한 실체적 조직이었다. 

  여섯 번째 책인 “황해감영관첩등록”은 의정부에서 편찬한 것으로 간행연도는 1869년경으로 추정되는데, 목차 중에 보부상들의 난동과 범죄를 다룬 ‘보부상행패(褓負商行悖)’라는 항목이 있다. 그렇다면 보부상이라는 용어의 사용례는 최소 186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훈섭의 주장대로 보부상이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오염된 용어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으로 명확해졌다. 전통적으로 써 온 옳은 용어는 부보상이고, 보부상은 우리나라의 전통을 폄하하기 위해 일제만 만들어낸 왜곡된 용어라는 이훈섭의 주장은 전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실상은 보부상이나 부보상이라는 용어가 혼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혼용되어도 아무 문제없는 용어이다. 각기 독립된 용어인 보상과 부상을 묶어 부르는 용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연세대와 고려대가 매년 펼치는 정기전을 연고전이라 부르건 고연전이라 부르건 딱히 어느 한 쪽이 틀렸다고 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 다만 조선시대 말 보상과 부상을 통합 관리했던 공식 관청의 이름이 ‘보부청’이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그동안 부보상이라는 용어보다 보부상이라는 용어가 널리 쓰여왔던 점까지 감안하면 이제와서 굳이 보부상이라는 멀쩡한 용어를 버리고 부보상이라 바꿔 표기할 이유는 없다고 여겨진다. 


  경제사에 문외한인 내가 앉은 자리에서 인터넷만 몇 번 두들겨도 알 수 있는 이런 사실을 그래도 그 분야를 수십 년간 연구해 왔다는 사람이 부정하고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알고도 그러고 있다면 사기이고, 모르고 그러고 있는 것이라면 지적 무능함이다. 그의 수업을 드는 학생들은 역사 바로잡기라는 명목하에 이런 터무니없는 주장을 인터넷에 조직적으로 뿌려대고 있는 모양인데, 이 역시 우려스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