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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노트

당으로 끌려간 고구려인 이야기

by kirang 2009. 5. 21.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며 고구려는 멸망했다. 당은 고구려가 국세를 회복하는 것을 경계하여 적극적인 사민정책을 펼쳤는데, 고구려왕 보장을 비롯해 많은 귀족들과 백성들이 당의 내지로 끌려갔다. 이중 귀족 계급은 정치적 고려에 따라 당으로부터 벼슬을 받거나, 전장터에서 활약을 하여 자리를 잡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연개소문의 자손들은 당나라에서 몇 대에 걸쳐 무관직을 역임하였고, 고선지 같은 경우는 당나라 장군으로서 서역 원정에 나서 명성을 떨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평범한 백성들은 나름 기회도 얻고 출세도 한 지배층보다 훨씬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다. 지금 소개하는 이야기는 중국의 "조야첨재(朝野僉載)"(7세기 말에서 8세기초에 저술)라는 책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중서사인(中書舍人) 곽정일(郭正一)이 평양을 깨뜨리고 고구려인 여자 노비를 하나 얻었는데 이름이 옥소(玉素)였다. 용모가 매우 아름다워서 재물창고를 담당케 했다. 정일은 밤마다 마실 것과 죽을 찾으며,  반드시 옥소가 그것을 끓이게 했다. 이에 옥소는 죽에 독을 넣어 내갔다. 그것을 마신 정일이 급히 외치길, "이 노비가 내게 약을 먹였다"하고는 토장과 감초를 찾아 먹고 해독을 했다.

  한참이 지나 소동이 가라앉고 옥소를 찾았으나 이미 금은(金銀) 기물 십여 점과 함께 사라진 상태였다. 황제께 보고하고 군장(軍將) 불량(不良)에게 명하여 샅샅이 찾게 하였으나 3일이 지나도록 잡지 못했다. 이에 사인의 집을 지키는 이들을 붙잡고 최근 열흘간 사인의 집을 찾은 이들에 대해 캐물었다. 그러자"어떤 고구려인이 편지를 주어 말을 담당한 노비에게 준 적이 있다"는 대답이 나왔다.편지를 빼앗아 검사하니 '금성방(金城坊) 중에 빈 집이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불량이 금성방의 빈 집들을 수색하는데, 그중 한 집에 단단한 자물통이 채워져 있었다. 그것을 깨고 들어가자 옥소와 고구려인이 함께 있었다. 고문을 가하니 그 고구려인과 말을 담당한 노비가 공모하여 그녀를 숨긴 것이 드러났다.동쪽 시장에서 모두 참수하였다.

(김현숙, '중국 소재 고구려 유민의 동향', "한국고대사연구" 23에 실린 사료이며, 한글 해석은 본인이 부분적으로 변개하였음) 

  이 사료에 등장하는 고구려인 여자 노비 옥소는 평양성이 함락될 당시 붙잡혀 온 사람으로, 아마도 평양에 살 때에는 양민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미색이 뛰어나며 정일이라는 자가 밤마다 찾았다는 것을 보면 평소 성(性)적으로 괴롭힘을 당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도주하면서 굳이 정일의 음식에 독을 집어 넣은 것을 통해 옥소가 그를 극도로 증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옥소를 숨겨준 고구려인은 독투입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옥소와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신분이나 정체, 옥소와의 관계는 불분명하다. 이역 땅에 끌려온 같은 고구려인이라는 동병상련의 정으로 옥소를 도와줬을 수도 있고, 어쩌면 옥소와 연인 관계였을 가능성도 있다. 드라마틱한 상상력을 발휘하면 옥소가 당으로 끌려간 뒤 그를 구하기 위해 찾아 온 오빠나 남동생이었을지도 모른다.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 땅에 끌려온 한 고구려 여인이 괴로움을 참지 못해 주인에 대한 독살 시도를 하고, 고구려인들이 도주를 돕고 은닉해 주었지만 결국 관련자 모두가 발각되어 참수를 당하고 말았다. 안 그래도 사람간의 차별이 심한 고대 신분제 사회에서 망국인으로서, 남의 나라 땅에 강제로 끌려가 고통을 당했던 이들의 처지가 애처롭다. 옥소의 이야기는 그래도 누군가에 의해 몇 줄 기록으로나마 남았지만 기록에 남지 않은 고구려인들의 서럽고 슬픈 사연은 수도 없이 많았을 것이다. 1300년도 더 된 옛 이야기에 새삼 가슴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