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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에 대한 리뷰

책 "치즈와 구더기"

by kirang 2011. 3. 3.



카를로 긴즈부르그 (지은이) | 김정하 | 유제분 (옮긴이) | 문학과지성사 | 2001-11-29
 
 《치즈와 구더기》는 그동안 익명으로 처리되곤 했던 종속 계급의 인물을 역사의 전면에 등장시킨 좋은 예이다. 진즈부르그는 사회사, 특히 계량사에서라면 하나의 숫자 정도로 취급되었을 존재를 최대한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해 묘사해 낸다. 이 작업은 마치 16세기의 인물을 눈앞으로 불러내는 것처럼 인상적이다. 《치즈와 구더기》의 작업방식이 지니고 있는 특징이자 미덕은 개인에게 초점을 맞춤으로써 문학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스토리’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일반적인 역사연구서에 비해 접근성과 생동감이라는 측면에서 큰 장점으로 작용한다. 진즈부르그의 서술방식은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그 실질적인 목적은 개인의 언행을 매개로 당시의 사회상을 조망하는 데에 있으므로 인물사라고 할 수 있는 평전과는 다른 성격을 가진다.
 
  그런데 《치즈와 구더기》를 읽으며 떨칠 수 없는 의문점은 역시 대표성에 있다. 메노키오는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평범한 인물이었다면 다른 대부분의 농민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세상에 존재했음을 증명할 어떤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진즈부르그는 메노키오의 ‘이단적’ 발언이 같은 농민 계층에 의해서 고발되지 않았다는 점과, 이단 판결을 받은 뒤 마을로 돌아와서도 큰 문제 없이 기존의 사회적 지위를 되찾았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이는 메노키오가 지니고 있던 사고의 틀이 당시 농민 계층의 그것과 거부감 없이 통용되는 것이었다는 생각의 반영이다. 하지만 이는 개연성의 범주에서 진행된 생각일 뿐이며, 반드시 그렇다고 보기엔 위험한 면이 적지 않다. 진즈부르그가 책에서 밝혔듯이 방앗간 주인은 당시 농민 중에서도 특별한 성격을 지닌 이들이었으며, 더구나 메노키오는 논쟁을 즐기고 자신만의 독특한 독서법을 지닌 개성있는 인물이었다. 이처럼 개성이 넘치는 개인을 통해 그 시대 농민계층이 지닌 보편성을 찾아내려는 시도는 그 시도가 지니고 있는 의의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위험성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나는 《치즈와 구더기》를 읽으며 미시사의 연구법이 기존 역사 연구의 사각 지대를 밝혀낼 수 있는 훌륭한 대안임을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미시사는 그 자체가 완결된 연구법으로 자리잡기엔 부족함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학의 본령은 인간의 사회성이 만들어내는 파동을 추적하는 데에 있으며 이는 거시적 안목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시사를 지향한 진즈부르그가 메노키오의 사례를 통해 밝혀내고자 했던 것도 결국은 당시 농민계층의 문화와 사고체계였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미시사는 훌륭한 거시사 연구를 바탕으로 했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미시사는 거시사의 대체물이라기 보다 보완물이라고 보는 것이 옳지 않겠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