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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노트

이사부, 우산국과 가야를 정벌한 신라의 상승 장군

by kirang 2017. 5. 15.

1. 이사부의 출신과 가계

  이사부(異斯夫)는 6세기 대에 활동한 신라의 장군이다. 신라의 제17대 왕인 나물마립간의 4대손이며 훼부(喙部) 출신이다. 정확한 생년과 몰년을 알려져 있지 않다. 우산국(于山國)을 정복하고 가야를 정복하는 등 전장에서 눈부신 전공을 세웠고, 중앙 정부의 고관(高官)이 되어 신라 정치의 실력자로 활약하였다. 이사부라는 이름은 태종(苔宗), 혹은 이종(伊宗)이라고도 표기되는데, ‘태(苔)’는 이끼를 말하므로, 태종을 훈독하면 ‘잇부’가 된다. 단양적성비에는 이사부(伊史夫), 『일본서기』에서는 이질부례(利叱夫禮)로 표기되기도 한다.

  이사부의 성은 『삼국사기』에 김씨로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유사』에서는 박씨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사부가 나물마립간의 4세손이 맞다면 그의 성은 김씨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신라에서 성에 대한 기록에 혼란이 있는 경우로는 박제상의 사례가 또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삼국사기』와 달리 박제상을 김제상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같은 오류가 발생한 것은 당시 신라에서 성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연구도 있다. 후대에 성을 붙이면서 부계나 모계에 따라 일관성 없이 성을 붙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 우산국을 정벌하다

  신라는 505년(지증왕 6) 주군현제(州郡縣制)를 시행하였다. 이때 지금의 강원도 삼척시 지역에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면서 이사부를 군주(軍主)로 임명하였다. 이 시기 군주의 성격에 대해서는 군대와 민정을 아우르는 지방관으로 보는 견해와 해당 방면에 설치된 정(停)이라는 군사 단위의 지휘관으로 보는 견해로 나뉜다. 어느 쪽이든 이사부는 신라의 동북부 해안에 위치한 주요 거점에서 강력한 군사권을 지닌 책임자가 되었다. 이사부는 말년 활동 시기까지 감안했을 때 대략 5세기 후반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므로, 군주로 임명되었을 당시에는 매우 젊은 나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책임 있는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왕실과 혈연적으로 이어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512년(지증왕 13)에는 지금의 강원도 강릉시 지역에 아슬라주(阿瑟羅州)가 설치되면서 이사부가 군주로 임명되었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이 일대의 군사적 중심지가 실직에서 아슬라로 옮겨진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 이사부는 아슬라 군주로 임명된 해에 바로 우산국 병합에 나섰다. 우산국 사람들은 성정이 매우 사나운 이들이었으므로 힘으로 복종시키기 보다는 계략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이에 이사부가 나무로 된 사자를 여러 개 만들어 배에 싣고 우산국 해안으로 가 항복하지 않으면 맹수를 풀겠다고 거짓 협박을 하였다. 그러자 우산국 사람들이 겁을 먹고 항복하였다고 전한다.

  우산국은 지금의 울릉도이다. 그런데『삼국유사』에는 이사부가 아슬라 군주가 되고 나서 우산국을 정벌한 것이 아니라 우산국을 정벌하고 나서 그 상으로 아슬라 군주의 직을 받았다고 서술되어 『삼국사기』의 내용과 선후 관계가 바뀌어 있다. 이사부는 그전부터 이미 실직 군주라는 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공을 세운 대가로 아슬라 군주의 직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새삼스럽고 어색하다.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아슬라 군주가 된 이후에 우산국 정벌을 수행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해 보인다.


  한편 이사부가 나무 사자를 이용해 우산국을 정벌하였다는 이야기는 너무 설화적이어서 그대로 믿기에는 다소 미심쩍은 면이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울릉도는 동쪽 바다 가운데 순풍으로 이틀 걸리는 먼 곳에 있으며, 우산국 사람들은 바닷물이 깊은 것을 믿고 교만하여 신하되기를 거부하였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산국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 했던 것은 나무로 만든 사자라기보다 이사부가 거느린 대규모 선단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울릉도 앞바다에 나타난 신라 수군의 규모가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자신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 믿었던 넓은 바다가 안전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항복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사부가 우산국 정벌에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그가 실직 군주로서 동해안 지역의 군사권을 관할하게 된 후 수년에 걸쳐 수군을 양성한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3. 금관가야를 정벌하고 병권을 잡다

  532년(법흥왕 19) 신라는 금관가야를 복속시켰다. 이사부는 이때도 활약을 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사부는 ‘거도(居道)의 계략’을 써서 가야국을 빼앗았다고 한다. 거도는 신라의 탈해이사금 때 인물이다. 그는 신라와 인접한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을 병탄하고자 마음을 먹고, 해마다 한 번씩 들판에 말을 모아 놓고 병사들이 말을 타며 놀게 하였다. 이것이 반복되다 보니 두 나라 사람들은 신라에서 항시 있는 일이라 생각하여 경계하지 않게 되었는데, 그 틈을 타 불의에 습격하여 두 나라를 병탄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사부의 금관가야 정벌 내용은 『일본서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사부는 529년(법흥왕 17)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다다라원(多多羅原)이라는 곳에서 세 달이나 머물며 시간을 끌다가 금관을 비롯한 4개 촌을 노략질해 빼앗았다고 한다(일본서기 권 17 계체천황 529년 4월) 이 기록에서는 이사부를 상신(上臣) 이질부례지(利叱夫禮智) 간지(干岐)라고 칭하고 있다. 이사부가 군대를 주둔시켰던 다다라원은 지금의 부산광역시의 다대포 일대로 추정된다.『삼국사기』에서 말하는 ‘거도의 계략’을 사용했다는 것이 바로 이때의 일이 아닌가 여겨진다. 신라는 이사부의 군사적 활약에 힘입어 532년에 최종적으로 금관가야를 복속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사부는 화려한 군사적 성공을 바탕으로 541년(진흥왕 2) 병부의 최고 책임자인 병부령이 되어, 중앙과 지방의 군사들을 모두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정치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한 것이다. 중앙 정계의 실력자가 된 이사부는 545년(진흥왕 6) 진흥왕에게 국사(國史)를 편찬하여 후대에 보일 것을 권하였고, 왕은 그 말에 따라 거칠부에게 국사를 편찬하도록 명하였다.

  550년(진흥왕 11)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도살성과 금현성을 두고 싸움을 하느라 피로해진 틈을 노려 두 성을 모두 빼앗은 후 증축을 하고 군사 1,000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고구려가 성을 되찾기 위해 공격해 왔으나 격퇴하였고, 이사부는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도살성의 위치는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이나 충청남도 천안시로 비정되며, 금현성은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이나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일대로 비정된다. 이사부가 펼친 군사 작전들은 대개 적을 기만하거나 의표를 찌르는 특징을 보인다. 이 경우에도 고구려와 백제의 싸움을 이용해 어부지리를 취한 것이다.


4.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대가야를 복속시키다

  551년(진흥왕 12) 백제와 연합한 신라군은 거칠부의 지휘 하에 고구려의 남변을 공격하여 한강 상류에 해당하는 죽령 이북의 10개 군을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또한 553년에는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되찾았던 한강 하류 지역마저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김무력을 군주로 임명하였다. 한강 유역 전체를 무력으로 장악하며 신라가 한반도 내의 실력자로 급부상하게 된 것이다.

  기록상에는 이때 이사부의 활약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 이사부의 지위와 위상을 감안하면 전체 군사 작전의 전략적 지휘를 맡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550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파악되는 단양적성비는 영토를 넓힌 척경비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이곳에 연명되고 있는 왕의 교(敎)를 받은 고관들의 명단에서 이사부의 이름은 가장 앞에 새겨져 있다. 여기에서 이사부의 이름은  훼부(喙部) 이사부지(伊史夫智) 이간지(伊干支)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는 신라 금석문에서 보이는 전형적인 인명 표기 방식에 따른 것이다. 이름 앞에는 소속된 부를 밝히고, 이름 뒤에는 ‘지(智)’라는 존칭어미를 붙인다. 그 다음에는 해당 인물의 관등이 붙는다. 이사부의 관등인 이간지는 17관등 중 2등급에 해당하는 이찬(伊飡)의 다른 표기이다. 참고로 단양적성비에는 한강 유역에 신설된 신주의 군주로 임명된 김무력의 이름도 새겨져 있는데, 그는 사훼부(沙喙部) 소속의 아간지(阿干支)로 소개되고 있다. 아간지는 6등급에 해당하는 아찬(阿飡)의 이표기이다. 김무력은 이사부의 활약을 통해 532년 신라에 복속한 금관가야의 왕자로서 김유신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어느새 노령에 이르러 후진들의 활약을 지켜보는 입장이 되었지만, 이사부가 지닌 화려한 군사 경력과 경험은 여전히 신라 전력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다. 562년(진흥왕 23) 신라는 대가야에 대한 정벌을 단행하였다. 총지휘관은 백전노장 이사부였고, 이사부를 보좌할 부장은 사다함이 맡았다. 사다함은 나물마립간의 7세손으로 이때 나이 15~16세에 불과하였고, 이사부에게는 증손자뻘이었다. 사다함은 나이는 어렸지만 패기 넘치는 무장이었다. 자신이 이끄는 5,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적군의 성문을 단번에 돌파한 후 흰 깃발을 세웠다. 대가야인들은 크게 동요하다가 이사부가 대군을 이끌고 도착하자 곧 항복하였다. 전공의 으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사다함이었다. 노장군 이사부는 사다함의 놀라운 활약을 지켜보며 후생가외(後生可畏)의 감정을 느꼈으리라.

  이사부에 대한 기록은 대가야 정벌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이미 고령이었으므로, 관직에서 물러나거나 사망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사부가 활동한 시기는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한 후진(後進) 국가였던 신라가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영토 확장을 본격적으로 펼쳤던 때였다. 신라는 가야 제국과 우산국 등 주변의 소국들을 제압하는 한편 전통적인 강자인 고구려와 백제를 상대로 화려한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다. 이처럼 신라가 욱일승천의 기세로 한반도의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하는 중심에는 상승(常勝) 장군 이사부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