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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노트76

위만, '한국사 최초'의 왕위 찬탈자 위만(魏滿, 衛滿)은 중국에서 고조선(古朝鮮)으로 망명하여 왕위를 찬탈한 인물이다. 위만은 왕위에 오른 이후에도 조선이라는 국명을 유지하였기 때문에, 그와 그의 후손들이 왕위에 있었던 시기를 '위만 조선'이라고 별도로 지칭한다.『삼국유사』에서는 고조선을 왕검조선이라고 부기하였는데, 원래의 국명인 ‘조선’ 앞에 ‘고(古)’를 붙인 것은 위만 조선과 구분하기 위함이다. 일반인들이 흔히 생각하듯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분하기 위함이 아니다. 『삼국유사』는 고려 때 저술된 책이기 때문에 이성계가 세운 조선이라는 나라는 당시 존재하지도 않았다. 위만의 이름 위만(魏滿, 衛滿)은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위만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중국 사서인 『사기』인데, 거기에는 단지 ‘조선왕(朝鮮王) 만(滿)’이라고만 칭하고.. 2015. 7. 27.
병자호란 쌍령 전투는 정말 300대 4만이 싸워 진 전투인가(2)-전투의 전개 쌍령에서의 싸움 경상도 근왕군은 경상도 관찰사 심연(沈演)의 지휘 아래 조직되었다. 그는 경상도 좌병마절도사 허완(許完)과 경상도 우병마절도사 민영(閔栐)을 선봉으로 삼아 앞서 진군하게 하고 자신은 후방 병력을 이끌고 뒤를 따랐다. 허완과 민영이 이끄는 경상도 근왕군은 1월 2일 남한산성 동남쪽 40리 지점인 무갑산과 등리봉이 마주보이는 쌍령에 도착하였다. 허완의 좌병사군은 남쪽에, 민영의 우병사군은 북쪽에 진을 쳤다고 하므로 쌍령 고개의 길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나누어 진영을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과 쌍령의 위치 진을 치는 과정에서는 약간의 의견 충돌이 발생하였다. 안동 영장(安東營將) 선세강(宣世綱)이 진영 위치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고 산 위로 진을 옮기자고 세 번이나 요청하였으나 허완에게 .. 2015. 7. 19.
병자호란 쌍령 전투는 정말 300대 4만이 싸워 진 전투인가(1)-배경 들어가며 쌍령 전투는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전투이다. 병자호란이 왕이 직접 나가 무릎을 꿇은 치욕적인 패배였고, 그 패배한 전쟁의 패배한 전투라면 그다지 기억에서 호출하고 싶지 않은 과거이기도 할 것이다. 그랬던 쌍령 전투가 최근에는 임진왜란기의 칠천량 전투, 6.25전쟁기의 현리 전투와 함께 '한국사 3대 패전'이라는 달갑지 않은 호칭을 받으며 새삼 주목받는 듯하다. 상대적으로 인지도와 관심이 떨어지는 쌍령 전투가 당당하게 '한국사 3대 패전'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 것은 전투에 참여한 병력의 차이 때문이다. 쌍령 전투는 청나라 군대 300명 대 조선군 4만 명이 싸워서 조선군이 전멸을 당한 전투로 회자되고 있다. 사실이라고 한다면 정말 황당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과연 이 내용이 .. 2015. 7. 19.
역사 저술계의 '수퍼 스타' 이덕일에 대한 소고 학자들은 자기 전공 시대 외의 글을 쓸 때 매우 조심스러워 한다. 본인의 지식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알기에 오류의 가능성을 떨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대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이덕일이 쓰는 글을 보면 고조선에 고대 삼국부터 조선 시대, 근대사까지 안 건드리는 분야가 없다. 왜일까, 천재라서? 그러기엔 이덕일의 글은 객관적 오류가 너무 많고, 자기 혼자 생각을 역사적 사실로 단정하여 서술하는 경우 또한 많다. 때문에 역사학계에서는 기본적으로 이덕일을 학자로 보지 않는다. 이덕일의 글이 재미있고 많이 읽히는 이유는 일단 그가 지니고 있는 문재(文材)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한편으로 그가 사용하는 글쓰기 방식이 ‘역사’라기보다 ‘소설’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즉, 역사적 실체에 대한 논리적 접근.. 2014. 8. 17.